2019년 9월 10일, 보루의 글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이 귀에 들어오기는 할까.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도 혹시나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몰라 줄거리를 다듬었다. 오밤중인데도 고속도로엔 차가 많았다. 운전대를 잡고 중얼중얼 단어를 다듬어 가며 이야기를 풀었다. 연습을 해두어야 그나마 헛소리를 덜 할 테니까.
아저씨도 열일곱에 아버지를 잃었어. 그 해 봄엔 어릴 적 동네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여름엔 시한부 3개월인가를 선고받고 투병하시던 아버지가 1개월 만에 돌아가셨고, 가을엔 맹장수술 때문에 병원에 입원도 했지… 1993년, 열일곱에 정말 이런저런 일이 많았었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에서 5일장을 치르는데, 어머니가 너무너무 슬퍼하시더라고. 고1이나 되었으면 뭘 좀 알았어야 할 텐데, 어머니가 그렇게 슬퍼하시는 게 이해가 안 되었어. “천국에 가면 다시 만날 건데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며 어머니에게 모진 말을 했던 게 두고두고 후회가 돼. 슬픔을 인정하면 신앙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길 만큼 어리석은 철부지였던 것이지. 또 한편으론 내가 괜찮은 것처럼 보여야 어머니가 덜 걱정하실 거라는 생각도 했던 거 같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든 말든, 지금 여기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두 번 다시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 어머니에게나 나에게나 얼마나 슬픈 일인지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 아니 알게 되었다기보다 그제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게지.
돌이켜보면 어린 나는 회피와 무시, 부정이라는 방법으로 죽음으로부터, 거대한 슬픔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슬퍼해도 괜찮아. 울어도 돼. 울다가 쓰러져도 괜찮아.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앙이 있어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야.’ 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말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싶어.
대학시절에 새롭게 깨우친 것들 중, 제일 고마웠던 것은 '감정을 하찮게 여기지 말자. 감정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것이고, 이성보다 뒤떨어지는 게 아니다. 감정에 흔들려도 괜찮아. 그게 인간이야. 네 자신을 부정하지 마. 하나님이 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실 테니, 너도 네 모습을 받아들여줘. 안아줘. 아니면 누가 또 널 안아주겠어...’라는 이야기였어.
아마도 대학교 2학년 즈음이었을 텐데, 큰 형이 어이없는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버렸어. 얼마나 슬프고 미치겠던지 학교 기숙사 6호관 뒤에 아무도 없는 빈 주차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한참을 울었어. 비가 많이 내렸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자세한 기억은 안나. 하지만 엉엉 울면서 분노, 원망, 슬픔, 기도를 마구 쏟아냈던 것은 기억해.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 삼키지 않고, 그렇게 쏟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해.
내가 듣지 못했던 이야기,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 슬퍼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눈물이 안 나면 안 나는 대로 억지로 울 것도 없어. 다른 가족을 신경 쓰느라 눈물을 삼키지 않아도 돼. 슬프고 먹먹하고 걱정되고 아픈 마음을 빨리 달래주지 않아도 괜찮아. 다만 어떤 마음이 드는지, 어디 몸이 불편한 곳은 없는지 가만히 살펴보면 좋겠어. 배가 살살 아픈지, 머리가 무거운지 입이 마르는지 살펴보자. 나 자신을 살펴주고 보살펴주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니까. 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 싶으면 잠시 밀쳐놓아도 괜찮아. 다만 너무 오래 밀쳐 두지는 말자.
이 이야기를 나눌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던 중 헤어지기 전에 어쩌다 문상객이 뜸해진 틈을 타서 지금 마음이 어떤지 물어보았다.
슬퍼요. 막막해요. 앞 일이 걱정돼요. 그래 그렇구나.
연습했던 이야기를 차근차근 다 나누진 못했다. ‘슬픔을 감추지 않아도 괜찮아. 스스로를 잘 살펴주고 돌봐주자.’는 요점만 잠깐 틈에 조심스레 전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차라리 다음 기회를 엿보아야 했을까?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을까? 오히려 슬픔의 무게를 비교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이야기를 풀어놓고도 마음이 무겁다. 좀처럼 기도를 안 하고 살았는데, 이럴 땐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Kyrie Eleison...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다. 작년에 어린 토끼를 떠나보냈을 때도 여전히 어쩔 줄 모르겠었다. 왕찬이형도 햄스터들을 여럿 떠나보내면서 동물들을 위한 천국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살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것들 중에 '나를 안아 주는 법,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 고단한 일상을 견디는 법'들은 정말 중요한 일인데 정작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다. 학교에서도 안 가르쳐준다. 막상 어른들도 잘 모르기에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겪으면서 배울 수밖에 없는 일인가...